당딩# 분열하는 조각들




 맙소사 이제 보니까 완전 손발이 펴지질 않네.....왜 이랬을까 한숨만ㅠㅠㅠ
해묵은 것이지마는, 드래그하면 얼핏 보실 수 있겠습니다요.


 


태초에 우리의 등은 붙어 있었을 거야.


분열하는 조각들


그 해 여름 태풍 '올가'가 한국을 강타했다. 수험생들의 교실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와 덜덜거리는 선풍기 소리 이외에 조용했다. 추위를 잘 타서 자기 혼자 겉옷을 걸친 등도 미동이 없었다. 기왕이면 확 끌어 앉고 싶었지만 반응이 뻔 할테니까 참고, 대신 소리 내서 불렀다. 이 교실의 침묵을 깨는 것은 꼭 내 일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 시대에 소위 말하는 날라리였으니까.

"둘리"

나의 부름에 담임 몰래 살짝 돌아보더니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획하니 돌려버린다. 귀여운 자식. 서너번 더 그러니까 이젠 아예 무시를 하더니 담임이 판서하는 것을 받아 적는 시늉까지 했다. 오호라, 네가 그렇게 나오시겠다. 나는 부르는 것을 관두고 조막만한 뒤통수를 보는데 매진했다. 어차피 수업 같은 건 애초에 주요과목이외에는 -주요과목이라고 잘 듣는 건 아니다- 들을 맘도 없었다. 50분이 지나 수업이 끝나고 1교시였던 담임이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고 나갔다. 그리고 난 그때까지 기다렸다.

"야. 둘리"

"아, 왜 그래 미쳤어?"

미친 거 이제 알았냐? 지원이 거의 발작하듯 신경질 내는데 이 짓도 한두번이 아니라 이번에는 조금 심각한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약속 펑크 낸 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야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누구 애인이라고 성깔이 더럽게 까칠하다.

"나 화났어. 건들지마"

"화 풀어. 진짜 바빴어. 진짜.'

"바빠? 후미진데서 쌈박질하는게 바쁜거냐? 웃기지도 않아요."

"따까리들이 덤비는데 어떡하냐. 좀 봐줘"

"씨발 얼굴은 또 왜 이래."

지원이 특유의 찌푸림을 보이면서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부드럽진 않았지만 자잘한 상처들을 모조리 짚어보는 손길은 제 나름대로 조심스러웠다. 과연 은둘리는 은둘리였다. 영리하지만 자긴 그걸 모른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다혈질이다. 물론 나처럼 그 다혈질을 싸움으로 풀진 않았다. 미련하게 쌓아두는 게 더 문제긴 하지만.

"아프겠지"

"어 그래. 아파서 쌤통이다."

"큭큭 이 몸은 막상 붙으면 아무생각도 안나."

"짐승들."

그가 심한 상처에 붙은 밴드 중앙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아야야……아프다. 은둘리, 아파. 그가 내 익살맞은 리액션에 희미하게 웃는다. 아프라고 하는 거야. 또 약속 안 지키면 혼난다? 이럴 때는 제법 제대로 성장한 고등학생 같다. 은지원은 그런 애였다. 3학년 8반 창가 줄에 앞뒤로 마주본 우리들은 '사랑'이라는 꽤 이상적인 관계에 있었다. 나는 무식하지만 그래, 그건 사실이다.

"우리 어제 못 본 영화 보러 가자."

"너랑은 안봐."

에이~ 나는 또 익살스럽게 그를 회유하려는 찰나 범수가 내 이름을 부르며 허겁지겁 뛰어왔다. 짧은 다리로 뛰어오던 범수가 끝내 걸상에 걸려 우당탕탕 넘어졌다. '아프겠다...'라고 말하는 지원의 눈썹이 또 희한하게 찌푸려진다. 범수는 헐레벌떡 일어나 꼭 걸상이 자기한테 다가와 고의로 그랬다는 것처럼 걸상을 발로 몇 번 깠다. 쟤도 가만 보면 성격이 드럽다. 팽팽 돌아가는 안경을 고쳐 쓴 범수가 내 앞에 섰다.

"김범수. 조심 좀 해라."

"승기야, 가,강석구가 오늘 또 오겠데."

"뭔소리하는 거야. 걔는 할 일도 없대?"

"모,몰라. 끝장을 내자고……"

어제 보고 뭣하러 나를 또 보러 온단 말인가. 그렇게 얻어 터졌으면 쥐 죽은 듯이 있을 것이지 다들 나 보고 싶어서 안달이야. 짜증이 치솟았다. 오고 싶으면 오라지. 나는 애인 손잡고 놀러 갈 거다. 나는 심각해 죽을 것 같다는 범수를 뒤로하고 우리를 관망하는 애인을 불렀다. 마치 내가 거기 갈지, 자기를 택할지 두고 본다는 예리한 눈이다.

"둘리, 뭐 보고 싶다고?"

"스,승기야. 강석구 온다니까!"

"바쁘다고 해. 야, 뭐 보고 싶어."

"아이씨. 진짜 오면 어떡해!"

강석군지 개석군지는 누구한테 지 맘대로 온다만다야. 나는 범수를 무시하고 지원에게 재차 물었다. 저렇게 멍 때리는 표정이지만 분명 속으로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고 있겠지. 그는 턱을 괸 손을 내리며 헤프게 웃었다. 웃지마 정들어.

"토이 스토리 2탄."

-

"사람들 다 나갔어. 나가자."

"……승기야 너무 감동적이지 않아?"

장난감들이 잔뜩 나와서 여기저기 쏘다니는 요상한 애니메이션이었다. 1편이 나왔을 때 엄청 인기 있었다던 데 솔직히 나는 1편도 보지 못했다. 지원이 나더러 촌스런 아저씨라고 했지만 우리 아버지는 엄한 사람이니 만화 영화는 아버지 안 계실 때 티비로 몰래 보던 게 전부이다. 열아홉 인생의 과반을 아버지와 훈련하며 도장에 있었다. 그렇다고 허투루 산 건 아니었다. 평생 배운 게 그것뿐이니 그것이 내 밥벌이가 되겠지. 극장 밖으로 나오는데 분무기로 뿌리는 것처럼 부슬부슬하긴 했지만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겨운 태풍. 문가에서서 둘이 함께 쓰고 있던 장우산의 비닐을 벗기자 그가 내 손을 막더니 그대로 극장 계단을 내려간다.

"승기야! 비 맞자."

"갑자기 왜 객기야. 들어와."

"싫어. 비 맞을래."

그는 고집이 굉장히 쌨다. 사실 그건 고집이 아니라 정말로 충동어린 객기였다. 가랑비가 더 무섭다고 거대한 습기를 한 움큼 머금은 그의 교복은 벌써 짙은 회색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우산을 펴고 얼른 다가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물론 그러면 까르르 거리면서 저만치 뛰어가고…나는 또 따라가서 씌우고…폭삭 젖은 꼴이 될 때까지 그러고 놀았다.

"어! 너 도장 가야될 시간이야."

"가지 말까?"

"안돼…너 아버지한테 혼날라고?"

지원이 항상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를 들어 확인했다. 분홍색 공순이 캐릭터가 그려진 아동용시계. 저게 어떻게 고장도 안나고 여태껏 손목에 차지는지 모르겠지만 작년에 하도 졸라서 생일 선물로 사줬던 싸구려 시계였다. 격일로 도장이 끝날 시간인 10시에 가서 아버지와 단둘이 수련 한다. 가끔 일찍 가서 꼬마애들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럴 필요는 없고 10시에 안가면 혼난다는 소리다.

"비를 맞나. 주먹으로 맞나."

"태권도도 싫지만, 맞는 것도 싫어. 얼른 가자."

둘 다 몸으로 하는 것이고, 극도로 거부하는 것들이다. 그는 몸에 가해지는 폭력을 참지 못했다. 내가 별거 아닌 거에 주먹다짐 하는 것도 엄청 싫어 할 정도였다. 결국 흠뻑 젖은 채로 도장까지 걸어갔다. 반지하로 이루어진 도장에서 마지막타임 아이들이 호령하는 소리가 올라왔다. 여기까지 나를 꼭 붙들고 온 지원이 급하게 작별 뽀뽀를 찍더니 빨리 들어가라고 나를 밀어 넣었다. 나는 구지 장우산을 챙겨줬지만 그는 그걸 쓰지 않고 돌아섰다.

"둘리. 우산 써."

"……."

"고집은. 공부하고 있어. 집에 얼른 갈게,"

"뭐 먹고 싶어?"

"우어. 저녁 해주게?"

"영화 보여줘서 고맙다고."

역시 세상은 살고 볼 일이다. 역시 강석군지 개석군지 하는 애랑 비오는 날에 더러워지면서 싸우는 것 보다 애인 만화영화 한편 보여주는 게 남는 일이다.

"김치찌개. 낮에 먹은 게 존나 느끼하다."

그는 서너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외로 우산을 펴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안봐도 비디오지만 저 모퉁이를 돌면 우산을 접을 게 분명하다. 뭐 그래도. 나는 터지는 웃음을 막으며 지하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토이 스토리 3탄은 또 안 나오나.

"아버지 저 왔어요."

"어! 승기형아 안녕하세요."

잔뜩 긴장한 채 운동하던 꼬마애들과 말끔하게 흰 태권도복을 입은 아버지가 나를 보고 인사했다. 사실 외관상 누가 보면 내 형인줄로만 알겠다. 그는 인고의 세월을 계속되는 수련으로 버텨왔겠지. 나는 탈의실로 들어가 젖은 교복을 얼른 벗고 도복을 입었다. 아, 빨리 집에 가고 싶다.






한밤, 온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고 누워서 벌어진 틈사이로 짐승들의 전희를 목격했다. 어두운 방안에서 허옇게 빛나던 젖은 등과 흰 다리들의 교묘한 감김. 시끄러울 정도의 신음 소리였지만, 나는 감히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저 새나가려는 울음을 막기 위해 이불을 입안에 넣었다. 충격에 휩싸인 나는 미친 듯이 이불을 씹었다. 오래된 장롱 안은 내 작은 체구 둘은 들어갈 정도로 크고 어두웠다. 전희가 절정에 달할수록 좀약냄새가 섞인 특유의 장롱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때부터, 조각들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분열하는 조각들 #2


"은지원."

"으…우으……엄마!!!!!!!"

"은지원!"

가는 머리카락들이 땀으로 온 이마를 뒤엎었다. 땀에 푹 절은 그의 파자마가 기분 나쁘게 몸을 기분 나쁘게 감았다. 서로 마주친 두 눈은 악몽에 시달려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

"한동안 안 그러다가. 또."

"몰라…몰라…"

"괜찮냐?"

지원은 어깨를 잡은 내 손을 치우고 일어나 놓아둔 자리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는 빈번하게 악몽을 꾸는데 그 내용은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에 관한 이야기겠지. 밖이 구릉구릉한게 천둥이 거하게 칠 것 같다.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물먹고 체하지 말라고 등을 두드려줬다. 얇은 피부 아래에 있을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참 김치찌개 했는데."

"정말? 나 배고픈데 지금."

"차려줄게."

깜빡 자버렸어. 그는 주섬주섬 컵을 들고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작은 원룸. 흔히 주택가 맨 꼭대기에 붙은 옥탑이었다. 그를 만난 뒤로 우리는 같이 살았다. 물론 이건 아버지 소유의 집이었지만 그는 또 센 고집으로 다달이 싼 월세라도 꼬박꼬박 냈다. 언제 또 후다닥 차렸는지 얼른 와서 밥 먹자고 한다. 찌개를 다시 데우니 작은 방에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캡짱 맛있지."

"큭큭, 어. 둘리 너 장사해도 되겠다?"

"으하하하. 그럴려고"

사실 좀 짜지만. 그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덩달아 웃었다.

"나 샤워하고 싶어. 땀 축축해."

"밥 먹고 하자."

"응, 빨리 먹어."

"너나 먹어."

"있지, 꿈에서"

"왜."

"엄마가…그 사람이랑."

뚝배기라서 그런지 찌개가 쉬지 않고 보글보글거렸다. 짭짤한 김치찌개가 술술 잘 들어가다가 막힌다. 나는 그냥 네가 그 새끼도 그렇고, 그딴 거 얼른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훌훌 털어버리고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 꿈꾸는 걸 내가 어찌 할 수도 없고. 그가 숟가락을 놓고 말을 잃었다. 은지원 여기봐.

"어이."

"……"

나는 또 정신없이 잘근거리는 손톱을 저지하려 손을 뻗어 손목을 밀어냈다. 잔뜩 물어뜯은 손톱 밑으로 엉겁결에 깨문 속살이 터졌다. 피가 손톱라인을 따라 퍼졌다. 고치지 못한 세살 버릇으로 인해 열손가락 열손톱이 모두 말이 아니다. 교복 주머니에 어제 샀던 대일밴드가 어디 있을 텐데.

"또 깨문다."

"……아파."

"이리와."

그는 순순히 일어나 벌려 주는 팔 안에 안겼다. 팔에 가득 습기 가득한 먹구름을 안은 것 같다. 빨리 비가 안 그치면 너무 우울해서 조만간 땅이라도 파겠는데 이거. 약 먹을래? 그는 고개를 흔들어 거절했다. 대체로 약은 안 먹는 게 좋았다. 저번처럼 부작용이 생기는 건 위험하니까. 그냥 너무 힘들 때 빼고. 약은 항상 구비되어 있었다. 그의 옷 안에도 가방 안에도 집안 구석구석 보이는 곳에 쥐약처럼 놓아두었던 것이다.

"뽀뽀 하자."

"야 무슨 밥 먹다가. 오빠가 다 좋은데 그ㅡ"

그가 마구잡이로 입술을 맞댔다. 김치찌개 맛이 나는 짭짤한 입술을 그가 마다 않고 비빈다. 그는 혀로 하는 키스에 미숙했다. 내가 그의 입안에 먼저 침입하자 놀라다가 유연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땀에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은 파자마를 스스로 벗는다. 잘 안 벗겨지자 짜증이 치솟았는지 반쯤 벗다가 그만두고 내 옷을 벗기려 든다. 내가 순순히 셔츠를 벗자 가슴 위로 달려들었다.

"빨리! 빨리…"

"……은지원…"

"하아…하아…스,승기야. 나,나…하응"

"……"

내 다리 사이에 안착해 있는 그의 맨엉덩이가 들썩 거렸다. 요요한 그의 물건이 벌써 발기했다. 벌써 사정하려는지 온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초점 또한 나를 보지 못하고 불안했다. 씨발, 과도하게 흥분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들어내 일어났다. 얼른 부엌 서랍으로 달려가 조그만 종이 봉지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그 사이에 참지 못하고 마룻바닥에 하얀 정액을 사정했지만, 괴로운 흥분은 계속 됐다.

"씨발! 은지원, 정신차려"

"스,승…흐아…으으……커흑"

숨쉬어. 옳지. 나는 봉지를 그의 입에 씌우고 배를 눌렀다. 과호흡으로 인해 봉지가 격렬하게 구겨졌다 펴졌다. 그의 고통으로 충혈된 눈이 빨래를 짜는 것처럼 소리 없이 울었다. 그렇게 봉지소리가 잠잠해 지도록, 나는 그를 붙잡고 있었다.


-

"…으으."

얼굴에 정면으로 돌파하는 햇빛을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잔뜩 갈라졌다. 아이고오 등이야. 그대로 벽에 기댄 채 앉아서 자버렸다. 세상이 너무 밝아 어리둥절하다가 무릎에 쭈그리고 누워 있는 그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씨발.

"은지원. 지원아."

"……"

"20분 남았다. 수업시작."

"뭐!!?"

그가 벌떡 일어났다. 눈곱이 잔뜩 낀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우리 둘은 얼른 벽에 걸어 둔 교복을 무작정 입기 시작했다. 나는 상관없었지만 그는 약속이 어겨지는 것도 엄청 싫어했다. 그래도 얼마만에 같이 등교하는 건데 지각은 면해야지. 나는 버벅거리는 그보다 빨리 교복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신발장 구석에 놓인 열쇠를 집었다.

"싫어."

"이번 한번만 타. 너 학주한테 못 맞아 봤지? 디지게 아파서 운다 너."

"……"

"거봐. 타."

옥탑하고는 전력으로 뛰면 3분도 안 걸리는 거리, 태권도장 뒤편에는 먼지 쌓인 오토바이가 있다. 무식하게 번 돈으로 무식하게 질러서 무식하게 사고 한번 나고 무식하게 얻어터진 전적이 있는 기계였다. 한번만이랬어. 지원은 당부하고 또 당부하면서 먼지만 닦으면 검은색 광택이 여전한 그것을 보고 치를 떨더니 올라탔다. 졸라 신난다. 그의 머리통에 헬멧을 씌우고 요란하게 출발했다. 등에 공포와 흥분이 섞인 소름이 돋았다.

"너 다음에도 혼자 가버리면 혼난다."

"뭐라고?!!"

새끼, 남은 다 서게 해놓고 나는 냅두고 자기 혼자 말이야……그러는거 아니야 임마.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너무 커서 듣지 못한 그가 크게 되물었다. 됐다. 그래도 좋으니까

"힘들지 말라고!!!"

"하나도 안 힘들어!!!"

그래.

허리 꽉 붙잡아.



1999년도 수능은 너무 쉬웠다. 것도 그럴 것이 공부밖에 한 것이 없었다.


분열하는 조각들 #3


"다음주?"

"으,응 사거리 지나서 거기."

"좆까라그래. 새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모,몰라 강석구 쫄따구가 아까 전화로..."

범수가 쭈뼛쭈뼛 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얘는 딴 애들한테는 잘만 말하면서 나한테는 불편하게 자꾸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 근처엔 고등학교가 많았다. 강석구는 사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학교 애였는데 접때 깨진 게 쪽팔려서인지 자꾸 들이댔다. 싸우는건 좋았다. 맞을 때는 더러웠지만 때릴 때는 딱 그만큼의 희열이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복잡한 생각들도 지워졌다. 아니다, 둘리랑 떡칠 때도. 으하하.

"애들은."

"걔들이야 당연히 오지. 오늘 밤에도ㅡ"

"둘리 기다린다. 간다. "

"꼭 와야돼!"

"알았어. 지겨운 좆석군지 개석군지 뭔지 조용히 좀 시켜야지."

건물 모퉁이에 서서 얘기하던 나는 짜리몽땅해진 담배를 발로 끄고 슬금슬금 스탠드를 걸어 내려왔다. 지원이 비에 젖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운동화 앞코를 진흙에 이리저리 비빈다. 무슨 왕따같이. 후비고 있던 진흙위로 내 그림자가 들어가자 그가 고갤 들어 나를 봤다. 정확히는 주머니 속에 든 내 주먹을.

"찌질이같이 뭐해."

"네가 나 기다리라며."

"가자. 오늘 좀 바쁘다."

"나 안 데려다 줘도 상관없는데."

"오빠가 들어가는 거만 보고 갈게. 이제 일 시작하면 바빠."

"알바만 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허."

적당한 높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걸어가는데 여전히 시선이 바닥이다. 킁킁. 담배냄새라도 나나. 괜히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얼른 운동장 구석에 세워둔 오토바이로 가서 헬멧을 씌우고 시동을 걸었다. 아침보다는 천천히 출발해 아버지 도장 앞으로 갔다. 주차장에 아침과 똑같은 모양새로 걸어 놓고 나오는데 쪼그려 앉은 지원이 드디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야. 돈 있어?"

미안한데 지금은 지갑도 뭐고 아무 것도 없었다. 오늘 월급을 선불로 받고, 지갑은 빳빳한 교과서들로 가득찬 사물함에 있었다. 조짐이 좋지 않다.

"없는데."

"……빵사줘."

"나중에."

"빵."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없는 돈이 땅 파면 나오나? 그는 금세 심통으로 볼이 부었다. 실은 땅이라도 파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저 말 나오기 전에 정기적으로 사줬어야 됐는데. 나는 계속 빵빵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돌아서 손을 끌었다. 얼른 집에 넣어두고 사라져야지 이거원.

"싸가지 없는 놈."

"……"

"개새끼. 호로자식아."

"……욕 좀 그만해라. 엉?!"

"씨발!!"

"야, 너 진짜!"

그래도 이제껏 꽉 붙잡고 있던 손을 내던지듯이 푸르고 신경질 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걸음도 한없이 느려서 -특히 저렇게 기분이 엿같으면 더 느리게- 언제라도 강아지가 끌려오는 것처럼 한 두어 발자국은 뒤에서 걷는다. 씨발, 정말로 개새끼면 말을 안 하지. 욕은 내가 하고 싶은 심정이다. 획 뒤를 도는데 시야에서 작은 대갈통이 어느새 사라졌다.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주저앉아서 우는 것이었다. 콧물은 질질 흘리면서 고아라도 된 것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서럽게 운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건 이제 부수적인 쪽팔림일 뿐이었다. 뚝! 뚜욱!

"흐흑, 좀 사주는 게 그렇게 싫으냐? 쫌생아!"

"존나 네가 애냐!? 집에 넘치는 스티커를 왜 모으는데?"

"보태준거 있냐!? 엉엉…이게 이제 나한테 소리 지르네…"

"다음에 사준다고 했어 안했어. 좆같은 빵은 먹지도 않잖아!"

"으아앙……국찐이가 아직 모자란단 말이야…엄마아…"

"엄말 왜 찾아. 얼른 일어나. 두고 간다?"

"씨발 이승기 너어- 가기만 해봐 너."

"이리와."

지원은 그대로 주섬주섬 일어나 슬쩍 내민 손을 붙잡았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서 느슨하게 걸린 그의 손가락들을 다시 꽉 붙잡았다. 내가 저거 때문에 귀찮아 죽겠는데 눈에 거슬려서 손은 또 잡아줘야겠다.

"석구 새끼만 조지고 또 사줄게"

"진짜지. 조지고 나서."

어, 그러니까 오늘은 짜증내지 말아라 쫌. 언제는 쌈박질한다고 죽어라 욕하더니, 국진이빵에 매수된 둘리는 그저 눈앞에 스티커만 어른거리나보다. 금세 안정된 목소리 톤으로 언제 질질 짰냐는 듯이 확답을 요구했다. 석구만 조지면 그딴 빵 한 트럭으로 사주마.

"그래. 너 근데 안하던 욕은 어디서 그렇게 배워서 입이 걸레야."

"지꺼 보고 배우지. 왜 저래."

나는 입맛을 다시며 그를 흘겼다. 맞는 말이니까. 아까는 고분고분하더니 범수랑 헤어지고 나서부터 저런다. 내뱉는 말이 날카로운 게 선인장을 한 화분 삼킨 것 마냥.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현관에서 집으로 퉁퉁거리면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돌아섰다. 갑자기 발소리가 멈추더니 나를 부른다.

"이승기!"

"왜."

"싸우는게 좋아?"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 있냐."

"맞지만 마."

"오빠를 뭘로 보고."

"오토바이 열쇄 던져."

……기억력은 좋아가지고.

-

"형 나 왔어요."

"어 왔냐."

다가오는 여름이라 해가 길어졌는지 겨울에는 벌써 화려했을 거리가 아직 어중간했다. 시내 외진 길에 있는 유흥가 거리에 가장 세련된 입구로 들어섰다. 지하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 뒷문으로 빠지자 이 가게에서 제일 환한 방이 나왔다. 큰 통유리 앞에서 백구형이 머리를 빗고 있었다. 형, 그 화장은 좀 아니다 싶어. 나는 교복 셔츠를 벗고 구석 라커에 있는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정통 양복은 아니고 그냥 좀 여시같이 선이 빠진 양복이었다. 까만 베스트도 있는.

"야 니 옷이 진짜 딱인데. 한번만 빌리자니까."

"형 안 맞는 다니까"

"알어. 알어 임마. 얼른 누나들한테 머리나 해달라고 해."

치. 백구형이 올백으로 넘긴 머리를 쓸면서 나갔다. 영업시작은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무슨 남자들이 그렇게 준비 할게 많은지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아주 더 난리들이었다. 아 피곤해. 일이라고 뭐 따로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주문 받고, 붙잡으면 놀아주고. 보수가 좋고 학교 애들이 여기 많이 와서 하는 일이지 별다른 거 없었다면 이런 찝찝한 일은 안했다.

"승기야."

"왜."

"나 어때."

미자가 가만히 앉아있는 나더러 묻는다. 나는 여자보는 눈은 없었다. 관심도 없고. 빤짝이는 이브닝 드레스에 올린 머리를 한 미자는 그런 내가 봐도 경박스러워 보이긴 했다. 물장사가 다 그렇고 그런 것을 어쩌겠니. 더 진하고 더 튀고 더 요란할수록 좋게 보는 곳이었다. 나는 그냥 괜찮다고 말해줬다. 거기서 또 안 괜찮으면 또 어쩌겠어. 간판 불이 켜졌다.

"웨이터들. 승기 빼고 나가봐."

"아 백구형 쟤는 왜 빼요. 맨날"

"얘는 알아서 부르잖아. 얼른 안나가?!"

"백구형."

"어 그래."

"범수네 왔어?"

"어 아까 구석에 있던 거 같은데. 일 있어?"

"아니, 그냥 누가 좀 조져달라네."

"얼굴이나 거기서 더 스크래치 내지마."

날 뭘로 보고. 백구형이 바쁘다며 후다닥 나갔다. 나는 영 맘에 안 드는 머리를 억지로 펴면서 밖으로 나왔다. 벌서 노래가 시끄러운 게 여기서 몇 시간을 있으면 나중엔 귀가 멍멍했다. 저 구석탱이에 앉아 있는 사내 무리들 근처로가 앉았다.

"왔냐."

"여어 이승기. 오늘도 멋진데."

"아아 좀 꺼져."

"야 개석구가 오늘 온다는 소문이 있어."

"뭔 개수작이야."

"몰라 생긴건 기생오래비같이 생겨서 개싸가지야."

아아 지겹다. 이런 애들하고 이런데서 이런 대화나 하고 있는 것도 똑같이 병신같은 개석구도. 나는 조이는 와이셔츠 앞단추를 하나 끌렀다. 오후부터 또 비가 내린다고 했다. 햇볕을 자주 못 보니까 나도 같이 땅을 팔 것 같다. 입구 쪽에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몇 명이 우르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앞쪽에 이 가게에서 일해도 될 법한 꽤 생긴 놈이 서있었다. 건들건들 거리기는.

"이승기!!!!!"

오냐.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기분도 우울한데 너 잘 만났다. 밖에 비가 오는지 들어오는 애들이 다들 축축하게 젖었다. 머리에 빨간 불이 켜졌다. 젠장, 지금 보니까 쟤 진짜 이쁘게 생겼네. 집에서 자고 있을 둘리가 존나 꼴렸다.



몇 대 맞고, 몇 대 더 쳤다. 녀석의 살은 없고 뼈가 굵은 주먹은 오지게 아팠는데, 맞을수록 뭔가가 차올라 달겨들기 좋았다. 때리면서도 꽤 잘생긴 얼굴을 망가트리는 구나 생각하는 중에 개새끼가 무릎으로 배를 찔렀다.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테이블 위를 다 깨부수고 가게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 주위에서도 꺄악거리는 누나들의 목소리와 퍽퍽거리는 주먹소리가 난무했다. 방심한 사이 팔꿈치에 맞은 코가 시큰하더니 피를 쏟았다. 아악 아프다 아파. 묘한 웃음이 났다. 긴 머리에 가려진 녀석의 입도 웃고 있었다. 새끼야. 못 일어나겠으면 웃지를 말던가. 개석구가 바닥에 굴복했다.


분열하는 조각들 #4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나더니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병째 벌컥벌컥 마셨다. 거실에 널려있는 내 문제집들을 한 쪽으로 치우고 이불을 걷어 매트리스 안으로 들어 왔다. 대뜸 허리를 감싸는 두 팔이 온 신경이 쏠렸다. 여자 향수냄새도 아니고 니코틴향과 피냄새가 난다. 싸웠나. 그가 얼굴을 내 등 가까이에 묻었다. 어깨뼈쪽이 입김이 닿아 뜨거웠다.

"담배냄새 나."

"아까 밖에서 좀 태웠어…피곤해."

"바보."

"미안"

조졌으니까 빵 사줄게. 순간 울컥했다. 워낙 승기네 부자 모두 무뚝뚝했고, 터지면 불같은 성격이어서 낯간지러운 미안하다 같은 소리는 잘하지 않는데. 나는 괜히 머릿속을 휘저어 오늘 틀린 미적분문제를 생각했다. 왜 틀렸더라.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찾았을 때는 속이 시원했다. 내 인생도 미적분처럼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잠이나 자."

"응…"

사실 잠을 못 자는 건 내 쪽이었다.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감으면 낮에 마주친 그 사람이 나타났다. 잠이 들면 그 검은 손이 피멍이 들도록 내 손목을 붙잡을 것 같았다. 우리 동네 골목길에서 어슬렁거리던 아저씨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오년전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서- 나는 헉,하고 숨이 막혀버렸다. 아저씨.

[오랜만이야?]

[가,가까이 오지마요!]

[나가 뒷구멍 맛을 좀 알아가지고.]

[아...아저씨가 어떻게 여기에..]

[인자 니 애미 구멍은 지겹드라고.]

[웃기지마요! 내가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이리와.]

싫어!!!!!! 나는 들고 있던 라면 봉다리를 그에게 힘껏 던지고 달렸다. 차마 뒤를 돌아보진 못했지만 아무리 뛰어도 바로 뒤에 있을 것만 같았다. 옥탑에 숨이 턱까지 차도록 한번도 쉬지 않고 올라가 문을 걸어 잠궜는데도 불구하고 들어올 것 같은 공포감이 뇌를 마비시켰다. 시커먼 손으로 어린 나를 단번에 깔아 뭉게서. 나를.

"승기야...승기야..!"

나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승기야 자지마.

"나 무서워."

내가 배꼽 밑에 들어와 있는 그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가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나를 가둔 팔에 힘을 주어 안았다. 나는 매트리스 밑에 손을 넣어 휘저었다. 가장자리에 잘 코팅된 얇은 종이가 만져졌다. 그것을 끄집어내서 끄트머리를 찢고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백색가루들이 순식간에 퍼져 목을 턱턱 막으면서 넘어갔다. 손을 내밀었는데 자리끼가 닿지 않아 결국 일어났다. 승기가 뒤척거리며 우물우물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갈증을 일으키는 약을 넘기려 물을 두어모금 마시고, 딱 그만큼 돌아오는 정신에 의존하여-

"나……아저씨 봤어, 오늘"

"아, 누구……"

"전남에 울 엄마 아저씨."

그가 갑자기 머리를 마구 흩트리며 일어났다. 나도 물. 내가 내민 주전자를 또 입대고 벌컥벌컥 마신다. 옆으로 흐른 물방울을 대충 닦는다. 쓰으으하는 소리에 슬쩍 얼굴을 보니 얇은 입술 가생이가 터졌다. 몸 안에도 상처가 많을 텐데. 신기하게도 매번 저렇게 싸움만 하고 돌아다니는데도 집에 약하나 없었다. 내일 마데카솔이라도 하나 사야겠다.

"그 놈이 그 시골에서 여길 어떻게 알고와."

몰라…몰라…나는 매트리스 밖을 삐져나온 이불을 잡았다. 승기야, 그 사람이 나 겁탈할지도 몰라. 그때처럼. 내 가슴팍을 터트릴 것처럼 누르고 내 좁은 입구에 욕망을 가득 밀어 넣을 지도 몰라. 그날 그 어둠속에서 짐승은 교미하고, 또 교미했으나 성에 차지 않았다. 나의 어미를 끊임없이 몰아붙이던 남자는 장롱 안에든 나를 발견하고 역겹게 웃었다. 엄마가 죽을 것처럼 신음하며 마지막으로 절정에 올랐을 때 그가 분출한 욕망은 나를 향했다. 그는 나를 보면서 그녀에게 사정했던 것이다.

"그 새끼가 널, 뭐?"

그냥 미친 애빈 줄 알았더니 상변태였구만. 좆같은 변태새끼를 진짜…그는 험한 욕을 쏟아 부으며 화가 나는지 머리를 또 마구 흩트렸다. 그가 멀쩡하게 보이는 나를 살핀다. 아까 먹은 리튬 때문에 정신은 아침 명상이라도 한 것 마냥 또렷했다.

"이리와."

그가 나를 잡아끌더니 헤드락하는 것처럼 안았다. 씨이, 깜짝 놀랐잖아. 그가 '이리와'라고하면 온몸에 힘이 빠졌다. 지지리도 속을 썩이면서 여기저기 깽판치고 다니는 이승기가 죽도록 밉다가도 저렇게 말하면 주문이라도 외운 것처럼 마음이 약해졌다. 배 안고파? 아까 라면 사려고 나갔던 건데 그것도 없다 이젠. 안고파. 그렇게 말하는데 내 귀가 닿은 옆구리 부근에서 꼬르륵 소리가 거하게 났다. 폼 잡기는. 갑자기 웃고 싶어졌는데 그가 폼을 너무 잡아서 그냥 뒀다.

"왜 말 안하냐. 답답하게."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런 말을 하겠어. 양부가 나를 강간했어요. 도와주세요. 아무리 우리 엄마가 술 팔고 몸도 팔아도, 그런 여자 자식이래도 인간이었다. 나도 남자였다.

"……좀 그런가?"

"꼴통아."

뭐라? 그가 내 머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악! 야야야 숨막혀! 무식하게 힘만 쎈 거 누가 모르나. 정말로 무식하게 내 머리통을 끌어안던 그는 어느 순간 힘을 풀었다. 거봐, 내가 배고픈 거랬지? 부스럭거리는 이불소리와 그의 꼬르륵 소리를 제외하고 조용해진 그 틈 사이에서 그가 나 모르게 중얼거렸다. 죽여버릴거야. 죽여버릴거라고- 나는 다 들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왜 그랬을까? 아저씨가 정말로 죽기를 바랬었나. 때 아닌 억울함이 들어서? 승기는 일단 자자며 그대로 옆으로 누웠다. 팔베개를 해주던 그는 저리지도 않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나는 리튬이 온몸에 퍼져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의 고른 숨소리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오래된 시계초침이 나를 붙잡았다. 깊은 새벽이 넘어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커져 초침소리가 묻혀갈 때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

"야 아무리 김치찌개가 좋아도 어떻게…"

"싫어?"

"……"

그는 그냥 고개를 숙이고 다시 밥을 퍼먹었다. 김치찌개를 좀 많이 끓여서 일주일내내 먹고 있다. 확실히 내가 끓여 놓고도 좀 짜지만 무식하게 그걸 다 먹는다. 내일은 계란말이라도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주말이라고 내내 저러고 있을 생각인지 가마가 보이는 머리통에 까치집이 생겼다. 큭큭거리며 웃자 왜 그러냐며 묻는다. 아니 그냥, 너도 어쩔 수 없는 애라구.

"가지가지해요…"

"왜 내 맘대로 웃겠다는데 그래."

내 시선이 그러면서도 머리로 향하자 뭔지 알아채고 마구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모발이 굵어서 모양은 잘 변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나는 짠 김치찌개를 떠먹는 걸 끝으로 수저를 내렸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들고 옥탑 밖으로 나갔다. 평상 위에는 해가 잘 들어서 엎드려 책읽기가 좋았다. 햇볕은 내 우울증을 위한 하나의 약이었다.

"둘리. 너 쌔카매 진다?"

"그래도 너보단 안까매. 간만에 비도 안오는데……."

"주말에 무슨 책을 읽냐."

언제 밥을 다 먹었는지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나온 그가 엎드린 내 옆에 앉더니 책을 쑥하고 뽑아갔다. 내놔! 지는 고삼이라고 공부도 안하는 주제에! 쓸때없이 팔은 길어가지고 손을 끝까지 뻗으면 닿지도 않는다. 고소하다고 웃는 면상을 한번 밀어주고 그대로 그의 위로 올라갔다. 그는 뒤로 넘어지면서 내 목을 끌고 같이 넘어졌다. 도드라진 그의 입술과 그대로 박치기 했다. 아플겨를도 없이 넘어오는 그의 혀에 꿀꺽하고 숨을 삼켰다. 툭하는 소리가 들려 곁눈질 했더니 책을 평상 아래로 떨어트리고 내 반팔티 아래로 손을 넣어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누가 날 간질이는 것 같은 기분에 튀어오르 듯 움찔 거렸다. 티셔츠가 가슴 끝까지 올라가고 부드러운 그의 면티가 살에 닿았다.

"……으하…!…숨막혀…"

그는 내가 몇 마디 하자마자 다시 입을 막았다. 올라탄 그의 바짓단 사이로 페니스가 막 고개짓을 시작했다. 하아ㅡ 회가 동했다. 당기는 구미를 붙잡고 나는 남은 손으로 그의 바지 버클을 끌러 사나운 그의 페니스를 부드럽게 위로했다. 참아. 그러자 그가 거칠게 몸을 뒤집어 평상위에 나를 깔더니 허리를 번쩍 들어서 바지를 벗겼다. 이 위아래 두 바보는 도저히 참을성이 없는 것들이다. 비타민D를 가득 머금은 대낮의 햇볕이 헐벗은 몸 위로 쏟아졌다. 이렇게 해가 중천에 뜬 한낮에.

"…야아…하읏……들어가자…응?"

"……싫어…"

얘는 틈만 나면 나를 골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자기는 손해 볼 것 없다고. 내가 가자고오 가자고 졸라도 그는 아랑곳 안하고 손가락에 침을 잔뜩 묻히더니 찔러 넣었다. 어디까지나 고통이었고, 생소한 기분이었지만 묘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말했지 않는가, 회가 동했다고. 정작 이승기보다 원하는 사람은 나였다. 약을 자제했던 날부터 내숭떠는 여우처럼 내 속은 언제나 자제를 못하고 욕정으로 들끓었다. 그것을 누르지 못하면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리를 넘어서 뛰는 심장따위도 조절이 불가해지면 안됐다. 그 욕정을 뚫는 그의 손가락 개수가 늘어날수록 아픔이 배로 늘었다.

"하악…아파! 으응…아파…"

"…둘리…너 진짜…"

귀가 막혔는지 그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가 않는다. 빨개진 입구에 그가 들어왔다. 그는 더 편한 삽입을 위해 나를 일으켜 안았다. 내 몸이 내려가면서 그의 것이 파고들어왔다. 온몸 가득 느껴지는 이물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는 뭐 좀 안 아프겠지 하고 천천히 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내려앉았다. 그가 더 식겁해서 몸을 뒤로 빼자 순간적으로 전립선을 스쳐지나갔다. 정말 눈물나는 쾌감이다.

"…흐악!"

"씨발…왜 갑자기 내려오고 지랄이야."

"안아파…흐으응…다시 들어와…어? 아까 거기."

그는 나를 단단하게 안고 움직였다. 이따금 다시 스쳐가는 그 느낌에 몸서리쳤다. 열뜬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그의 까치집 머리가 내 관자놀이 옆에서 찰랑찰랑 거렸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가 절정에 이를수록 나에게 외쳤다. 승기는 평소엔 꼭 그런 말 못한다고 하다가도 섹스 할 때에 저런 말을 했다. 내가 저에게서 꼼짝도 못하게.

"승기야…아!아으! 승!…기야…"

"……크흣!…하아…"

어린 우리는 음식도, 섹스도, 사랑도 서투르기 짝이 없었지만 그 후에도 그 순간들은 다이아몬드처럼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너도 그렇지?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후회한다. 마지막인줄 알았더라면 몸이 부서지도록 섹스할걸.
 

분열하는 조각들 #5


"둘리, 나 나갔다 온다."

"나가?"

"도장에."

매트리스 위로 햇볕이 쏟아져 엎드린 그의 등이 눈부시게 희어 보였다. 운동화를 꾸겨 신고 몇 번이나 그렇게 등을 봤다. 현관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평상 밑에 아까 던진 책이 보였다. 손을 뻗어 주은 뒤 두꺼운 책에 뭍은 흙을 탁탁 털었다. '향연'. 은지원은 공부를 잘했다. 내가 괴롭혀서 잘 못하는 거였지. 책을 현관에 던져 넣고, 뜨거운 날씨에 단단히 말려진 도복을 챙겨서 도장으로 향했다. 그동안 몇 번 빼먹었으니 맞을 각오도 단단히 하고. 도장에 들어가니 주말이라 오전반 아이들이 막 끝나서 나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겁게 나를 한번 보더니 흐트러진 도복을 바로 했다. 우렁차게 인사를 마치고 나가는 초등부 애들이 내 바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승기형!!"

"여어, 오랜만이다 땅꼬마."

"형. 사부님 완전 화났어요."

"…형 엄청 맞게 생겼으니까 얼른 집에 가라."

"아프면 엄마한테 약 발라달라고 해요."

"알았어."

그럴 엄마는 없었다. 적어도 있을 때에는 내가 그녀를 더 챙겨준 날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기처럼 부서질 것 같은 여자와 결혼했다. 울고 웃고의 끊임없는 반복. 일반인보다 극대화 되었을 뿐이지 인간의 정신이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유리처럼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인생 중 절반을 보살폈다. 지겹고도 징그러운 사랑이었다. 뒷정리를 하는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나와 너무 닮아서 기가 찼다. 그렇게 원망했던 그의 사랑마저도 닮아있었다.

"죄송해요."

"……통제가 안되는 애구나. 너는."

"시간이 안났어요."

"기가 빠져서는. 정신차려라."

"아버지야말로, 내일 무슨 날인지 아시잖아요."

"핑계 대지마."

전 같았으면 대걸레자루가 부러지도록 맞았겠지만 그는 때리지 못했다. 저 굳건한 근육들도 죄다 허물이었다. 남겨진 우리가 살기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엄마는 자살했다. 어느 날은 하루종일 눈물을 흘리고 어느 날은 내내 흔들의자에 앉아서 뉴스를 보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그녀에게 죽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손발을 씻겼다. 비가오고 천둥이치는 여름은 그녀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그녀의 악몽은 나에게도 악몽이었다. 나는 약했기 때문에 악몽에 그녀를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저는 아버지랑 달라요. 그렇게 한순간에…"

"그게-! 최선이었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고. 한번도, 최선이랍시고 그는 한번도 산소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지극히 사랑했으면서도 운동에 물두해 단한순간에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댐처럼 쌓아온 불신이 수문이 열려버린 것처럼 터져 나왔다. 끓어오르는 열을 덮어 김이 나는 것 같다. 나는 흰 도복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집에 넘치는 게 도복이었지만 그건 하나의 반항의 상징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 초라해 졌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나약한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그와 다르다. 씩씩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저 당분간 안와요,"

아버지는 그저 돌아가는 나를 두고 내 도복을 집어 툭툭 털 뿐이었다. 정신없이 수련했던 어릴 때는 항상 이 반지하를 올라가는 길이 무슨 구원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머리가 자라고보니 너무 별볼일없는 것이었다. 나오면서 주머니에서 몰래 챙겨온 바이크 열쇄를 꺼냈다. 찰랑 거리는 소리를 내며 매력적으로 손가락에 걸렸다. 이제 못 참겠다.

-

나도 모르게 서울을 빠저나갈 뻔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가게로 향했다. 저번에 깽판을 쳐놔서 몇일 나오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백구형 말이 있었지만, 말이야. 어? 그 가게 얼마나 잘된다고. 백구형은 역시 내가 얼굴을 보이니 되려 반가워했다. 대충 옷을 껴입고 몇 번 홀을 돌며 상대해주고...아줌마들 엉덩이 좀 주물러주고, 주는 술 몇잔 받아먹고 그리고 몰래 탈의실에 들어가 담배를 피웠다. 정말로 이안에 있으면 대낮인 기분이 들었다. 미자는 언제부터였는지 소파구석에 드러누워 있었다. 양주를 얼마나 처 마신거야.

"미자야. 안 나가냐?"

".……아 속 안 좋아. 그 대머리 새끼…"

"그니까 요령 피우면서 부어야지."

"것도 그렇고 까졌어. 영감탱이가."

"미자야."

"어?"

"강제로 빠구리 뜨면 기분이 어때?"

그냥, 궁금해서. 미자는 몸을 뒤집어 나를 봤다. 쟤는 정말 센스가 하나도 없었다. 눈에 시퍼런걸 잔뜩 칠하고 원색의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담배 줄까? 미자가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여서 빨던 담배를 물려줬다. 한모금 빠는데 너무 말라서 목부근에 뼈가 확 도드라졌다. 미련한 여자.

"…후우-…엿같지. 죽고 싶고."

"죽고 싶어?"

"어."

정말로 죽여 버려야겠다. 새벽은 짧았다. 가게에는 창문 따위가 없어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나도 모르게 이미 어머니 기일을 맞았다. 나는 일어나서 수트를 벗었다. 가게? 응 갈데가 있어서. 잘가. 쉬어라. 미자는 담배를 끄고 다시 담요를 뒤집어 썻다. 락커에 구겨지지 않게 잘 걸어둔 뒤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지상은 길어진 해 덕에 벌써 미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어제 하루해가 쟁쟁하더니 후텁지근했다.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더우면 다음날 비가 오는데. 대충 헬멧을 쑤셔 넣고 산소로 출발했다.

-

길가에 바이크를 세워두고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냥 죽어라고 무단결석하고 일치고 다녀도 추후 통보하던 것이 오늘따라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어디에 있다고. 학교 갔으려나.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받지 않았다. 자동응답기로 연결되는 소리가 들리고 두어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둘리, 오빠 산소 같다 온다. 소주 좀 따라 드리고, 안부도 전해 줄게.]

어머니 산소는 너무 멀었다. 물론 아버지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둔 거겠지만 머리털이 자라고서는 나 혼자 찾아가려고 술장사 틈에 껴서 바이크를 샀다. 한번 사고를 낸 뒤로는 거의 못 탔지만 시동을 켜면 언제라도 매일 타왔던 것처럼 달릴 수 있었다. 등이 시려와 어께를 앞뒤로 돌렸다. 등을 자세히 보면 실밥자국이 있는데 어께뼈가 된통 금이 갔었다. 별말안코 들고있던 수화기를 내려놓으니 딸랑하고 50원이 빠졌다. 요즘 오십원 가지고 뭐 할게 있다고.

"많이 드세요."

겨우 오후가 돼서야 도착한 나는 근처 가게에서 소주를 몇병이나 사서 부어 드렸다. 엄마 한번 나 한번. 기분만 우울해지면 그렇게 못 먹어서 안달났던 술, 죽고 나서야 못 먹을 게 없었다. 산소는 여기저기 잡초가 나서 너저분했다. 봉분 앞에 주저앉아서 가는 시간이 무색하도록 있었다.

"왜 날 두고 죽었어요."

엄마가 겁탈 당하기라도 했어요? 누가 구박하고 때렸어? 아름다운 그녀를 열렬히 사랑한 나는 무엇이 그녀를 괴롭히는 지도 모르면서 낫게 해준답시고 그 어린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했다. 어쩌다가 또 그녀랑 똑 닮은 애를 만나가지고. 어쩌다가. 죄도 이런 원죄原罪가 없다.

"화나 죽겠어. 당신도. 은지원도."

화나. 나를 '사랑'이란 꼴같잖은 단어로 옭아매 피곤하게 하는 존재들. 나도 정신병에 옮은 게 아닐까? 평생을 그들과 살았더니 내 성격도 변덕이 죽을 끓었다. 내 주위의 세상은 모두 다 뒤틀려 있었다. 허긴, 그 부서진 조각들 안에서 정상으로 산다는 것이 비정상이었다. 결국 어머니에게 줄 곳 따라드리던 술을 절반은 내가 마셨다.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주량에 반에 반도 채우지 못했는데 어지러워져 잔디에 드러누워 스스로 물었다. 화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쩌라는 거야.

"씨발."

그가 단 한번 나에게 행사한 폭력은 그에게 수백 배로 되돌아갔으리라.

철없는 사명감과 순정은 그의 어머니와 나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더 커다란 아픔이었다.

분열하는 조각들 #6

삑.

[둘리, 오빠 산소 갔다 온다. 소주 좀 따라 드리고, 안부도 전해 줄게.]

삑.

[둘리, 오빠 산소 갔다 온다. 소주 좀…………]

아저씨의 출몰의 횟수가 들어났다. 등교할 때나 하교할 때, 심지어 어디 잠깐 슈퍼라도 갈라치면 느껴지는 섬뜩함에 치를 떨었다. 가끔은 골목길 끝에 서서 나를 보고 있기도 하고 심각한 상황은 등 뒤에서 따라온다던지 기습해서 내 앞에 나타 날 때였다.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에 있으면 언제라고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면서 나를 위협했다. 점점 신경이 쇠약해질수록 어처구니없게도 이승기가 원망스러웠다. 이승기는 저번 주말에 도장에 간다고 나가서는 또 주말이 다가 오도록 오지 않았다. 어머니 기일은 알고 있었지만 왜 돌아오지를 않아. 나는 이렇게 무서운데. 문을 걸어 잠그고 정신없이 문제집을 풀고 있었는데 깜짝 놀래키며 집전화가 울렸다.

[저,저기]

"…범수? 어쩐일이야."

[승기 좀 데려가라구…가게에서 몇 시간째 이러구…]

"걔가 거기 왜 있어……술 먹었냐?"

[으응, 엄청 많이 먹었어.]

"기다려."

전화를 끊자마자 문제집을 덮고 집을 나왔다. 산소간답시고 안 들어오더니 결국 여자끼고 술이나 퍼먹는 거였다. 더 화가 난건 안타기로 했던 오토바이가 가게 앞에 있었다는 거다. 장마철에 미끄러져 죽으려고 바이크를 탄단 말이야? 열쇄를 없애 버리던가 해야지.

"지,지원아!"

"김범수. 이승기 어딨어."

"오,온지 얼마 안됐어…"

"그래서 어디!!"

김범수의 전화를 받고 가게에 들어가자 시끄러운 음악이 내 귀를 찔렀다. 시끄러운 건 나에게 독이었다. 순식간에 예민해져 짜증이 솟구쳤다. 약을 먹고 싶어. 오늘따라 바지주머니에도 약이 없었다. 눈을 피로하게 하는 조명들이 마구 난사되고 그 가운데 이승기가 있었다. 언젠가 그가 일한다며 입던 옷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내가 가장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이승기였는데, 이 가게에서 우리 승기가 제일 잘생겼네 하고 웃었는데. 오늘은 손님이 되어서 저기 있다. 얼마나 마셨는지 발의 움직임이 불규칙 적이었고 반쯤 감은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대뜸 그에게 다가갔다. 금요일 저녁이라 사람이 너무 많았다. 중심부에 다가가 그의 단단한 팔을 잡았다.

"뭐야."

"어떻게 전화도 없이, 여기가 산소냐!?"

"아……지겨워."

"뭐?"

"지겹다고. 지겨워ㅡ 너같은 애."

"이승기……"

"씨발, 5년인데도 여태 엿같은 네……"

그의 혀꼬부라진 발음에 사고회로가 멈췄다. 벙쪄있는 나를 두고 그가 연신 주물럭거리던 여자의 목에 입을 가져가며 풀린 눈을 하고 비리게 웃었다. 꽤 멀리 있는데도 여기까지 술냄새가 낭자했다. 피가 내 몸 어딘가로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정상이야! 정상이야!! 뇌가 그렇게 외쳤다. 때려. 나는 내 정신에 조종당하는 인간이었다.

"개자식!"

손톱을 새우고 여자를 잡아 땠다. 긴 생머리가 내 얼굴을 단단히 치며 물러났다. 손톱이 스친 이승기의 턱밑에 빨갛게 금이 갔다. 따가운지 눈살을 찌푸린 그가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여자는 아슬아슬한 하이힐로 중심을 잡더니 한껏 짜증을 내며 돌아섰다. 술에 잔뜩 도취된 주위 사람들이 은근슬쩍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죽일 듯이 달려들자 무서운 얼굴을 한 이승기는 그대로 내 멱살을 잡고 온힘을 다해 오른 볼을 내려쳤다. 나는 악소리도 못 지르고 떨어져 나가 모세처럼 갈라지는 인파 사이에 넘어졌다. 노래는 여전히 시끄러웠는데 조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를 잘못 쳤는지 종이에 베인 것처럼 따갑고, 머리가 띵했다.

"…하아…하아……하하하"

"……웃지마. 은지원"

"하하하하…"

은지원. 은지원. 왜에-더 때려봐. 엿같은 정신 좀 돌아오게. 그는 때려놓고서 당황했나보다. 나를 때렸던 주먹을 다른 손으로 잡더니 술이 깼는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리고 뭐라뭐라 욕을 내뱉고 나에게 다가와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맞아보니까 알겠는데 너 정말 힘세다. 나는 얼얼한 볼을 누르고 일어났다. 물론 나를 일으키는 그의 손은 뿌리쳐버렸다. 그의 조롱이 사실이 되라고 정신병자마냥 웃었다. 은지원. 지원아. 그가 가게를 나가는 내 팔을 잡았다. 너도 그때 죽고 싶었어? 별 이상한 질문을 다했다. 아저씨한테 당했을 때 죽고 싶었냐고? 나는 지금이 더 죽고 싶어.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

오늘은 맞고 싶지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비에 홀딱 맞고 집에 돌아왔다. 옷을 입은 채로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집크기 만한 좁은 욕조를 빠르게 채우며 김이 나는 따뜻한 물이 온몸을 뒤덮었다. 쭈그려 앉은 나는 새삼 다가오는 슬픔에 그제야 울 수가 있었다. 갑갑한 가슴이 자기를 멈춰 달라고 토로했다. 문득 세면대 위에 놓인 면도칼이 보였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유가 없었다. 삶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이승기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죽어. 그냥 죽어. 또 머릿속에서 명령을 한다. 코끝까지 찬 물속에서 손을 뻗어 날카로운 양날을 쥐었다. 눈을 질끈 감고 햇볕을 밭지 못해 흰 손목 안쪽을 그었다.

"아-!"

얇은 골을 남기고 칼날을 놓쳤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피가 물속에 떨어져 투명해졌다. 아픔보다 공포가 엄습해 더 깊이 넣을 수가 없었다. 실패한 자살은 비참할 뿐이다. 나는 그렇다고 죽을 만큼의 용기도 없었던 것이다. 손목을 붙잡고 오열했다. 좁은 욕조의 물이 탁해지도록-

심한 현기증으로 욕실을 나오자마자 누워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이 돼서야 몽롱한 의식너머로 언제 들어왔는지 그의 등이 느껴졌다. 맞닿은 딱딱한 서로의 등이 너무 뜨거웠다. 마르고 볼품없고 하지만 뜨거운 우리의 등. 퉁퉁 부은 눈을 가까스로 뜨고 팔꿈치에 닿는 가까운 물체를 확인했다. 아까 읽다가 잠든 플라톤의 책, 두꺼운 양장본의 모서리였다. 북마크가 책의 끄트머리에 가있었다. 결론을 봐야하는데. 승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너와 나는.

"태초에 우리의 등은 붙어 있었을 거야."

"……"

"신은 원래 하나였던 오만한 인간을 둘로 갈라놓았지."

그는 잠자코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그에게 호되게 맞은 볼이, 자해한 손목이 아렸다. 청승맞게 눈물이 비집고 나올 것 같더니 막상 울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요지가 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처럼 가벼웠다. 뜨거운 등이 아파…내 등의 주인은 너인데.

그래서 나는……내 반쪽이었던 너를 갈망하고 있어.

그게 나의 사랑이라고, 너와 내가 사랑해야하는 이유. 사랑하는 너에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어서 좋아. 사랑하는 승기야. 승기야. 나는 너 없이ㅡ 그것은 하나의 흐느낌이었다. 중심없이 흔들리는 내 간사한 목소리가 빗줄기 사이로 흘렀다. 비가 저렇게 우니까 울 수가 없다. 우리는 왜 불구자마냥 자유롭지 못해서 이렇게 지쳐버릴까.

"……그러니까…나한테…지겹다고 하지마"

"…사랑해."

"…지겹다고…"

그러면 신은 또 나를 반으로 가를거야. 나는 조각조각 흩어져 버릴거야.

"사랑해 은지원."

태풍 '올가'는 사라졌는데도, 또 다른 여자가 찾아와 비가 억수로 내렸고. 우리는 섹스 중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고아처럼 살아가는 동안에 누구도 나에게 사랑한다고 해준 적이 없거늘. 세상에서 너만이ㅡ 바깥에 빨래 안 치웠는데 큰일 났다. 거기에 네 도복도 있고, 내 교복셔츠도 있는데. 생각은 무수했지만 일어나서 치울 생각은 안했다. 무언가 딴 생각을 할 것이 필요했다. 그가 보지 않도록 욱신거리는 손목을 가렸다. 내 패배한 삶과도 같은 저 흔적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등을 돌려 나에게 수없이 용서해달라고 말했다. 오만한 인간인 나는 너에게 용서 할 것이 없어. 그리고 등을 두어번 만져 주더니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어릴 적 장롱 안에서 맡았던 그 좀약냄새가 났다. 꿈꾸지 말고 자라.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이 들었다.

-

"……흐흑…"

일어났는데 눈물부터 나왔다. 나는 잠잘 때 죽은 사람처럼 거의 미동이 없다. 뻐근한 몸으로 눈을 떠 허리를 살짝 비트는데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손으로 승기의 자리를 더듬으니 한가득 느껴지는 비닐의 감촉들. 몇 개나 사놓은 걸까. 이 바보는 무식해서, 도대체가 산수도 못하고 돈 관리도 못한다. 얼굴을 한가득 찌푸리고 꺽꺽거리며 우니까 뭔가 따갑게 찔러왔다. 볼을 만지니 엉성하게 붙여놓은 대일밴드 밑으로 덕지덕지 처바른 마데카솔이 손에 묻었다. 자기가 한 대 실컷 쳐놓고 자기가 엉성하게 수습하고, 병주고 약주고.

"바보…멍청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의 빈자리 대신 널려 놓은 국진이 빵들과 조우했다. 왠지 맛있어 보이는 까만 초코빵을 골라서 비닐을 뜯었다. 스티커는 생전 처음 본 새로운 종류였다. 하지만 난 스티커를 버리고 빵을 먹었다.-사실 항상 스티커를 빼고 빵은 버렸었다.- 잔뜩 메이는 부스러기들. 어렸을 적엔 바쁜 엄마가 밥을 못 해주는 대신에 매일 빵을 먹었다. 지겨운 빵은 꼴도 보기 싫었다. 그래도 매일 이승기한테 스티커를 핑계로 빵을 사달라고 졸랐다. 왜 그랬을까. 나의 병은 항상 집착과 충동을 유발했다.

"흐으…으아앙…목말라. 목마르잖아! 이승기! 이승기!!이승기…"

맛없는 싸구려빵을 들고 목이 메인다고 아무리 이승기를 불러도, 그는 오지 않았다. 나를 두고 또 어딜 가버렸어. 심지어 내가 그 빵들을 다 먹어 갈 때에도 그는 빵을 둔갑이라도 했는지 보이질 않았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그 며칠 동안을 무단결석했다.




분열하는 조각들 #7


[야 미친놈아!]

[……]

[나랑 자. 나 미치게 하지말고 그냥 나랑 자잔말이야!!!]

결국엔 저렇게 소리 질렀는데. 저 골목 끝에 아저씨는 나랑 마주보고 빙글거리며 웃기만 했다. 학교를 안간 이유 중에는 저것도 있었는데, 잠깐 도장에 승기 아버지를 만나러 나왔을 때 마주쳤다. 결국 나는 또 겁이 나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잘근잘근. 불안으로 손톱을 깨물었다. 습관은 역시 고쳐지질 않았다. 저번에 피가 나서 아물어가는 손가락을 또 터트려 피맛이 났다. 어쩐지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똥마려운 개처럼 집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숫자를 지역번호를 누르고 집전화 7자리를 누르는데 어쩜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5년만에 눌러보는 번호가 왜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지.

[네~여보세요.]

"……엄마."

[은지원?]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요살스러웠다. 왜냐면 항상 준비가 돼있어야 하니까. 어유~ 김사장님. 호호호 그럼요 이사장님. 자주자주 오세요~ 박사장님. 해야되니까 어쩔 수 없이 만성이 되버렸겠지. 5년만에 듣는 목소리인데도 전혀 반가운 기색이 없었다. 시계를 보니 막 바쁠 시간이다. 멍청하니까 화를 돋구지. 내가 말문이 막히자 그녀가 짜증을 냈다.

[너 또 무슨 훼방을 놓으려고 전화했어!]

"미안해. 엄마……"

[헛소리할거면, 끊어.]

"엄마! 아저씨. 아저씨 왜 여기에 있어?"

자꾸, 자꾸 날 따라와. 쫓아다녀. 엄마네 아저씨가 왜 여기에 왔어. 무섭게 여기에 계속 있어. 나는 두서없이 중얼중얼 거렸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기가차는 듯이 큰 헛숨을 쉬었다. 딱,딱,딱 경박하게 껌 씹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렸다. 턱이 빠지게 씹었어도 절대 못 따라했던 그 소리.

[얘가 미친년 다됐네……그 놈이 거길 왜가?]

"아냐. 자꾸 날-"

[이놈아. 그 놈 벌써 한달전에 노름하다 다리 부러져서 움직이지도 못해.]

"……뭐?"

[한달 째 골방에 쳐박혀서 늘어져라 놀고먹는단 말이다.]

머리가 아팠다. 나는 무얼봤어? 그건 엄마에게 물어본다고 나오는 답이 아니었다. 혹시 몰라 마구 눈을 비볐다. 세게 비볐는지 속눈썹 여러 개가 손등에 떨어져 나왔을 뿐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서워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무서워서 내가. 여전히 촌스런 트로트와 딱딱거리는 껌소리가 수화기너머로 들렸다. 그러다 멈췄다.

[은지원.]

"……"

[은지원!]

"…엄마…"

[행여나 여기 내려오지 말아. 알아들어?]

너 여기서 나간 거 잘한 짓이야. 내 아들이 평생에 가장 잘한 짓이야. 멀리 멀리 도망쳐라. 내가 미련하게 남자를 잘못만나가지고. 미련퉁아, 오지말아. 그래도 배 아파 나은 자식이라고 그런 꼴 당하는 거 눈 아파 못 보겠더라. 잘 도망쳤어. 모를 줄 알았어? 그 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어...엄마는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하다가 속사포처럼 풀어놨다.

[다시는 전화하지 말고. 이 놈 죽을 때까지 거기 있어.]

엄마가 알고 있는 줄은 몰랐다. 좀약 냄새를 맡으며 지켜봤던 그 순간 그녀는 알았을까? 내가 아저씨가 막은 수건에 입이 막혀 울부짖는 동안에도 그녀는 알았을까? 불쌍하고 불쌍한 우리 엄마. 그녀는 당부하고 당부하며 전화를 끊었다. '죽여 버릴거야' 문득 이승기가 말했던 그 요상한 글자들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너는 또 어디에 갔어. 안절부절 하면서 좁은 옥탑 안을 돌아다녔다. 깨무는 손톱이 너무 아파 대신 자동적으로 입술을 마구 질근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수화기를 들고 아무거나 아는 번호를 눌렀다.

"범수야!"

[어, 왠일이야?]

"혹시 이승기 너랑 같이 있어?"

[아니 어디 갔는지 모르겠는데.]

"왜 몰라. 너 친구잖아. 범수야 알잖아."

[지,진짜 몰라아! 가게도 또 아,안나오고…]

죽여버릴거야. 죽여버릴거라고.

"……정말로?"

[뭐라구?]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전화를 끊었다. 약. 약.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숨겨진 약을 먹었다. 목이 막혀서 냉장고 안에 든 물병을 승기처럼 입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신발장 위. 식탁 구석. 탁상. 문제집 사이. 필통. 냉장고 사이드칸. 화장실 세면대 위. 책상 서랍. 창틀에 하나. 매트리스 밑에 하나 더. 열 개 이상을 먹으니 그렇게 손닿는 곳에 있었던 봉지약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약. 약. 한참을 더 집을 뒤지다가 갑작스런 어지러움에 바닥에 꿇어앉았다. 손이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덜덜 떨리고 눈앞이 굴절되어 보였다. 결국 집을 나와 시멘트길바닥을 맨발로 미친 듯이 뛰었다. 콕콕 찌르는 바닥을 박차고 사거리를 지나 시내로 나가도 약국이 보이지 않았다. 겨우 학교 근처까지 갔을 때야 큰 약국이 하나 보였다. 분명이 걷고 있었는데 무릎이 시큰했다. 오른 다리 근육이 꼭 저린 것처럼 힘을 잃어 넘어졌다. 흐으윽. 아기처럼 울음이 터졌다. 거의 기어가다 시피해서 들어간 약국엔 여자 약사가 턱을 괴고 있었다.

"……하아,하아…약, 약 좀 주세요!"

"괜찮아요!? 무슨 약이요. 처방전은요?"

약사가 벌떡 일어나 데스크를 나와서 내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나를 막 흔들었다. 숨 막히는 더위에 땀이 이마를 흘렀다. 아니면 눈물이.

"……없어…약이요…저어 막 허,헛것도 보구요…"

리튬. 하얀 가루요. 그거 안 먹으면 더 미칠지도 몰라요. 저 때문에 우리 애인이요. 우리 애인이 정말 여기엔 오지도 않았던 아저씨 죽이러 갔나봐요. 정신은 이렇게 똑바로 말하는데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들을 죄다 우리반 범수처럼 더듬었다. 중년의 여약사는 여기저기 터진 내 몸을 살피더니 카운터 뒤로 돌아가서 약국 전화기를 들고 말했다.

"정신질환 약은 함부로 팔 수 없어요. 지금 같이 병원가요. 네?"

"…으으으…서,선생니이임…흐…고쳐주세요…저 좀 고쳐주세요……"

그녀가 나의 이름을 물었는데, 말이 나가지 않았다. 제 이름 은지원이요. 은지원. 하는데 그녀가 아무런 대꾸없이 계속 내 이름을 물었다. 그녀가 무얼하려는지 다시 데스크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가지마세요 고쳐주세요 나 좀 고쳐줘요. 나는 그녀의 바짓단을 잡고 늘어졌다.

"학생! 이제 119 올거야. 기다려봐요. 약 좀 가져올게. 응? 놔봐요."

그녀에게서 가까스로 떨어지는데 공기가 내 등을 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학생! 학생! 약사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넘어가는 나를 다시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차가운 타일 바닥이 볼에 닿고 페이드아웃 하듯이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하나의 점이 되어버렸다.

-

"이선생님! 깼는데요?"

"은지원 학생? 대충 들릴거에요."

강제로 눈을 벌리더니 전등으로 동공을 이리저리 비췄다. 흰 가운을 입은 젊은 의사가 꽃분홍 옷을 입은 간호사를 대동한 채 차트를 뒤적뒤적 거렸다. 주위가 시장통에 누워있는 것처럼 시끄러운 것이 응급실 같다. 심한 갈증을 느껴 침을 넘길 때마다 목구멍이 아팠다. 의사의 목소리는 굉장히 낮고 침착해서 현장과 이질감이 들 정도였다. 나는 초점이 살지 않는 눈을 하고 그 흰 가운의 어딘가 쯤을 바라봤다.

"혼수, 발진, 착란에 손떨리고 말더듬는 대다가 근육이상. 이거 죄다 급성약물중독이에요. 혹시해서 진료기록 찾으니까 올초에 병원 정기적으로 다녔었죠? 학생, 조울증이 약을 그렇게 들이붓는다고 낫는 것도 아니야. 차라리 다니던 정신과를 더 다녔어야지."

수험생이 되고부터는 병원에 안 가게 됐다. 괜히 몸만 안 좋아지니까 불필요하다고 생각돼서 약 먹는 것도 거의 안 먹었고. 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그에게 여기저기서 '이거 어떡해요?'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 '이선생님!' 아주 난리가 났다. 그는 하나하나 다 짚어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들어오는 환자를 응급처치한 뒤 다시 돌아왔다. 내 앞머리를 한번 짚더니 숨을 돌렸다.

"일반병실로 올려줄게. 거기서 치료해야겠다."

그의 목소리는 정신이 뚜렷해지는 느낌을 주었다. 두명의 조무사들이 내 침대를 끌어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가로지르는 병원 홀이 시끄러웠다. 사람을 초초하게 하는 구급차의 경적. 조무사들이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병원 방송 타는거 아닌가 몰라."

"오토바이사고 아냐? 이런 일로도 나가나."

"아니 그냥 사고면 모르겠지만……누구 죽였다던데. 칼로."

"칼로?! 누굴? 고딩이라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가지가지 했구만."

"몰라~ 어떤 남자. 하필이면 우리병원에 다 죽은 애를 데려와 가지고."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 눈이 번쩍 뜨였다. 침대를 끌고 있는 조무사의 손을 잡자 그녀가 식겁하며 소리를 질렀다……어디 있어요? 다 죽은 애 어디 있어요. 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까 나왔던 응급실로 직행하는데 다리며 발바닥이 여기저기 쑤셨다. 굳었던 딱지들이 사정없이 벌어졌다. 조무사들이 다가와서 나를 붙잡으며 말렸다. 입구 쪽에서 치료를 하던 이선생이 날 보고 행동을 멈췄다. 이선생이고 뭐고. 어수선한 응급실에 유독 커튼을 모조리 친 침대가 있었다. 커튼을 뜯어냈다. 이선생이 다가와 나를 불렀다.

"은지원 환자."

"못 알아보게…얼굴을 다 가려놨어요."

머리는 붕대가 칭칭 감겨있고, 커다란 산소마스크를 쓴 얼굴은 심하게 다쳐서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미미하게 심장 박동 수가 금방 꺼져버릴 것 같았다. 일단 혼수상태인데, 깨어나도 힘들거야. 신원이 아직 불확실해서…몇 개 없는데 소지품이라도 보여줄까? 나는 급하게 고갤 저었다. 내가 그걸 왜 봐요?! 보면 끝나는 거야. 나는 이대로 집으로 가려고 결심한 채 돌아섰다. 집으로 가면 네가 있을거라고. 나는 이선생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내 애인은 더 잘생겼어요.



분열하는 조각들 #8


그들은 그를 기다리지도 못하게 하려는지 날 가만 놔두지 않았다. 쩔뚝거리면서 집에 돌아와 여느 때처럼 문을 꼭 잠그고 식탁에 가만히 앉았는데 그때부터 전화가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아쉽게도 전화기는 식탁위에 있었다. 아직 손이 떨려서 귀에 닿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여보세요? 저기.]

이선생?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이름도 모르지만 그의 굵고 깊은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전화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이 나더러 이승기학생을 아냐고 물었다. 아냐고? 선생님은 어떻게 아세요. 내 애인을. 그가 나를 기억했는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더니 '하!'하는 허탈하고도 서글픈 숨이 들렸다.

"우리, 우리 승기 어떻게……아냐구요…"

울지마. 안울어요. 내가 딱잘라 말하자 그가 말을 시작했다. 몇 번 전화했었는데, 사체 주머니에 이거 적힌 종이가 있었어. '시신'. 그는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무언가 무너지는 와르르 소리가 들렸다.

[학생 돌아간 후에 심장이 멈췄어. 마지막으로 전화한건데……안 운다며 은지원 환자.]

"…흐윽-아니야! 그건 못생겼잖아요! 원래 이승기는, 그 개새끼는!!…으흡-"

나한테 욕도 잘하고, 진적이 없을 만큼 싸움도 잘하고, 잘생겨서 아줌마들한테 인기도 많아요. 저번에 사고 났을 때도 몇 달만에 훌떡 일어났는데! 차라리 이승기가 와서 나를 한 대 더 후려쳤으면 좋겠다. 이선생은 바쁠 텐데도 내가 우는 것을 멈춘 뒤에 먼저 끊겠다고 할 때까지도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병원에 다시 와줬으면 좋겠어. 이선생이 겨우 전화를 끊었다. 아주아주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지저분해진 옷을 갈아입고 허기가 져서 밥을 먹었다. 계란말이를 부치는데 정신이 없어서 한쪽을 좀 태워먹었다. 분주하게 젓가락질을 하다가 앞자리에 밥 한그릇을 더 푸고 수저를 놓았다. 너 해준다고 했잖아 계란말이. 내가 한 그릇을 다 비우도록 앞자리에 놓인 밥은 줄지가 않았다.

-

"아버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덩치가 매우 크고 한눈에 봐도 건강해 보이는 그가 긴장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느릿느릿한 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 보였다. 뛰어왔는지 흐트러진 도복차림이었다. 실로 그에게 가장 어울리고, 승기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모습. 그는 어지러운지 내 어깨를 짚었다. 묵직함이 전해져 주저앉고 싶었다. 어디 있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얼굴이 이그러진 시신을 확인했다. 소량의 잔돈, 피가 뭍은 오토바이키와 우리집 번호가 적힌 종이, 아저씨를 살해한 흉기도 확인했다. 나 때문에 죽었어요. 죽어버렸어.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버님은 굳어버린 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후에 모든 것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그의 차안에서 그가 말했다. ‘널 위해서니까 홀가분해지도록 해.’ 당연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더 이상 죽은 아저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에게도 다신 전화하지 않았다. 리튬도 더 이상 먹지 않았다. 그가 죽고나서야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나중에 사범님 되면 진짜 멋있겠다.

-너 태권도 싫어하잖아.

-그래도, 너니까 멋있겠다고.


"어 범수야, 그래.그래. 고마워. 너도."

전에 없었던 휴대폰에 간만에 또 범수의 이름이 찍혔다. 후우. 이러니 내가 잊을 수가 없다. 여름 끝물이라 바람이 마냥 후텁지근하지 않은 것도, 범수의 전화도 나에게서 그를 일깨우는 것들 중 하나였다. 왜 오늘이 매년 이렇게 빨리 오는지 도무지 알 수 가 없다.

-탁탁-

라이터에 불이 잘 붙지 않는다. 모처럼 맞이한 흡연의 기회를 놓치게 생겼다. 담배는 고삼 때부터 피웠다. 피울 수밖에 없을 적이 있었다. 나는 기름이 다 떨어진 지포라이터를 도로 넣고 아쉬운 김에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이것은 원초적인 버릇이었다. 껌은 고사하고 빨대나 종이컵 가장 자리, 손톱까지 입에 닿는 것은 나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씹는 것이었다.

-치이익-

"……뭐야."

불쑥 튀어나온 싸구려 라이터에 반사적으로 목을 뱄지만 라이터를 든 주인이 누군지 확인하고 다가가 불을 붙였다. 끄트머리가 멋진 빛깔을 내며 타들어갔다. 한 모금 빨아들이자 마음을 안정시키는 니코틴이 순식간에 머릿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불안감에 질겅거리던 버릇이 마법처럼 멈췄다.

"가지세요 라이터."

"이대리. 업무가 수월한가봐?"

"과장님 보다는 많아요."

빈정거리는 게 분명한데 전혀 빈정거리는 태도가 아니다. 싱글벙글 병든 닭처럼 웃는다. 심지어 억양도 거슬리지 않는다. 이 새끼. 야비한 이대리새끼. 그래도 불은 붙어 줬으니 참는다. 나에게 나쁜짓 한 것도 없는데 왠지 얘한테는 정이 안 갔다.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55분. 점심시간 종료까지 5분 남았다. 이대리를 흘겨볼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니코틴을 저장했다. 그는 쉬지 않고 흡연하는 내 옆에서 멀뚱멀뚱 서있었다. 빠르게 절반정도 타들어가자 얼른 담배를 비벼 꺼버렸다.

"그건 버릇이에요? 담배필터 저렇게 씹는 거."

"어쩌다가 생겼어."

아니 원래 있었어. 그가 갑자기 내 손을 가져가더니 손가락을 여기저기 살폈다. 깨물어서 상처투성이네요. 나는 후딱 손을 빼냈다. 남이사. 오지랖만 넓어 가지구. 그는 내가 기분 나쁘게 손을 털어내는 동안 출구 근처에 가서 문을 열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면 딱 맞겠다. 내가 갑자기 불어제끼는 큰 바람에 갈 생각을 않자 그가 말했다.

"이리와요."

"……뭐라구?"

"우리 늦었어요 얼른 오시라구요."

자동적으로 움직이려는 몸체가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몇 달전 조부장이 소개시킨 신입사원 이진석은 갓 제대한 사회초년생이었다. 몸매균형이 좋아 핏이 딱 맞는 양복은 그대로 아직 어색하기만햇고, 결정적으로 얼굴이 훤하게 폈다. 두 달만 다녀봐라. 그늘이 생길테니. 그때 한손에 머그잔을 든 나는 고개를 가닥이며 대충 인사했다.

-잘 생기긴했네

진석이 긴장된 목을 빳빳이 세우며 '안녕하십니까!' 하고 구십도 이상으로 꾸벅 절했다. 휙하고 고개를 숙일 때 바람이 나에게 닿는 것 같았다. 서른줄이 넘어간 나에겐 저런 패기가 없었다. 아니 한번이라도 있었던 적이 있었나. 젊구나.

-혈기왕성하네……

내 말투에 이진석을 포함한 사원들이 다같이 웃었다. 서른을 넘긴 나는 성공해있었다. 순탄한 인생이었다. 가을부터 제대로 시작한 공부치고 수능도 잘 봤고, 운 좋게 입사해서 빠르게 승진했다. 그 십일년이 모든 게 느려 터졌던 내 인생 안에서 가장 빠른 구간이 돼버렸다.

"여기.여기.여기. 잘못된거 보이지? 여기 수정하고 이대리한테 2010년 삼사분기꺼만 정리하라고해."

"네"

가영이 히끄무레하게 한숨을 쉬더니 긴 생머리를 깊이 숙이며 수긍했다. 그녀는 입사한지 일 년이 넘었어도 삼 개월이 지난 이진석보다 버벅 거렸다. 입사 초 두 달만 지나보라는 내 으름장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진석은 언제 어디서나 구김살이 없었고 더욱이 여사원들 절반은 그를 좋아했다. 얼굴에 한치의 변화도 없다니. 남들은 다 좋아하겠지만 나는 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랑은 너무 다르다.....누구랑? 하여튼 독한 놈. 눈이 마주치자 그가 살갑게 웃었다. 하긴, 징한건 내가 더 징했다. 괜한 생각을 털고 옥상에서 사무실로 내려가는데 그가 갑자기 멈췄다. 넓은 등에 아프지 않게 맞부딪쳤다. 아야, 왜 갑자기 멈추고 그래.

"과장님 영화 보러 안갈래요?"

"이대리랑 가면 무슨 재미야."

"보러가요~ 저 밥도 사주시구요"

"이대리. 힘없는 샐러리맨 거덜내려는 거지?"

"에이. 은과장님 돈 많이 버는 거 회사 식구들 다 알아요."

"뭐 볼건데 요즘 볼게 뭐가 있다고…"

"토이 스토리 3편요."

뭐? 순간적으로 놀랐다. 에이 유치해 보여요? 저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가실거죠? 난간을 붙잡았다. 석진이 내 손을 붙잡고 뛰어 내려가며 계속 붇기에 얼떨결에 승낙해 버리고 말았다. 주말 멀티플렉스 극장은 혼잡했다. 조용하고 한적한 극장이 좋은데. 평일에 내가 이승기와 자주 갔었던 극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깨끗하고 팝콘냄새가 퍼진 영화관은 난생처음이었다. 토이스토리도 난생 처음보는 것처럼 어색했다. 영화 내용의 후반부에 와서도 머리가 어지러워서 제대로 볼 수 가 없었다.

"과장님, 너무 감동적이지 않아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승기과 이석진은 극과극의 인간들 이었다. 석진은 누구처럼 입이 험하지도 않고, 다혈질이지도 않고, 피부가 새카맣거나 근육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이석진은 그냥. 고개를 흔들었다. 저건 토이스토리 3고, 지금은 2010년이다. 씨발, 몇 년간 생각도 못했던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등이 허전해. 십여년간 골처럼 패인 내 등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은과장님, 울어요!?"

"……고마워하는 거야."

"뭐를요?"

보통의 삶을 사는 기쁨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정상인이 되었다고 네가 날 더 사랑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과 너를 맞바꿨다고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이승기. 이승기. 그리고 그를 발현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메세지를 들었다.

[둘리, 목소리 좀 듣자니까 왜 집에 안 붙어 있냐. 흠흠, 네 말대로 우리 등 붙어있었을 거야... 그냥, 그 새끼만 없으면 네가 행복할거란 확신이 들어. 씨발, 돈 없네 끊는다.]

끊지마. 끊지마! 불러도 안 오는데 마음만 급해서 저렇게 소리 질렀다. 이석진은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집에 데려다 주겠다며 나를 일으켰다. 과장님은 어딘가 허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나에게 음료수하나를 뽑아준 석진은 꽤 좋은 집에 사는지 차가 좋았다. 그가 준 사이다 한 캔을 다 들이킬 때쯤 우리 동네에 도착했다. 여전히 허름하고, 여전히 으슥한 우리 동네. 석진은 옥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신기하다는 듯이 두리번거렸다. 녹슨 열쇄로 겨우 문을 열자마자 들어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사이다로 달아진 입안이 시원하게 쓸렸다. 여름 끝물이라 아직도 열대야가 있다.

"의외인 곳에 사네요."

"떠나기 싫은 집이라. 어디라도 앉아있어."

"자동응답기 불이ㅡ"

그가 평생을 그곳에 있었던 전화기에 다가와 빨간불이 켜진 자동응답버튼을 눌렀다. 안돼. 나는 놀라서 물병을 떨어트렸다. 둔탁한 소리를 낸 플라스틱 물병에서 콸콸 쏟아진 찬물이 내 양말을 적셨다. 석진이 토끼눈을 하고 날 쳐다봤다.

[회사에 있나보구나. 승기 보러 가는 중이다. 바쁘더라도 언제 주말에라도 도장에 찾아와.]

[은과장 핸드폰 꺼놨어? 주말에 잠깐 회사 나와야 될 거 같은데.]

[지원아, 잘 지내냐? 새끼 승기 없으니까 연락도 안하고 술이나 먹자.]

오늘 걸려왔을 메시지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둘리, 목소리 좀 듣자니까 왜 집에 안 붙어 있냐. 흠흠, 네 말대로 우리 등 붙어있었을 거야…그냥, 그 새끼만 없으면 네가 행복할거란 확신이 들어. 씨발, 돈 없네 끊는다.]

"……"

"죄송해요. 제가 너무 주제 넘-"

"너, 너 누구야."

"네? 과장님…왜 또 울어요…."

"이승기…"

"그게 누구에요…"

"이승기…이승기…너는 왜…"

"……"

환각이나 환청은 네가 죽은 후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어째서 네가 이석진과 겹쳐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이승기가, 아니 이석진이 그렇게 말했다. 이리오라고. 승기야,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라니 입에서 나간 말치고 정말 대책없는 말이었다. 이석진이 나를 어떻게 안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애한테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어쩐지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내가 이유 없이 다가가 식탁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를 껴안자 그는 당황해했다. 있잖아 이대리. 점심 때 느끼한 거 먹었으면 내가 김치찌개 끓여줄까. 나 이래보여도 칭찬받은 사람인데. 그가 내 엉뚱한 말에 굳어버렸던 그가 그다운 호탕한 웃음으로 유연하게 대답했다. 과장님 진도가 너무 빠른데. 하하, 이대리 혈기왕성하잖아. 그의 목 언저리에 턱을 기댔다. 언젠가 머릿속이 부서진 날들이 있었어. 분열된 조각들이 가엾은 그를 괴롭혔지만 내 조각들 또한 나약했을 뿐이었어. 그래서 나의 애인은 온몸을 다쳐가며 나를 사랑해 준거 있지. 태초에 우리의 등은 붙어있었을 거야. 등이 붙어있다는 건 그런거야. 그는 그런 사람이야. 석진아……승기야.






 

by 권련 | 2009/11/25 00:00 | 말소된 페이지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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